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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 글/설교.묵상

노동과 쉼에 대해(내용추가)

사또2 2015. 10. 23. 20:20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1(창1~12)<하경택>



노동과 쉼에 대해


1.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다.

  헬라 세계에서는 노동에 대한 이해가 부정적이이었는데, 노동해야하는 사람은 덕성을 갖춘 행동을 하기에 부적절한 사람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노동/일'은 구약성서는 노동을 창조질서에 해당하는 것으로 말한다. 

창2:5의 '부재상황'에 대한 서술에서 "땅을 경작할"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켜야"한다.

창세기2:2에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노동의 종결과 노동으로부터의 쉼이 두가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쉼을 통해서 비로소 노동이 완성된 사실을 보여준다. 

  노동 없이 쉼만 있으면 진정한 쉼이 되지 않고, 쉼없는 노동만 있어도 진정한 노동이 되지 않는다. 결국은 창조질서의 완성된 모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 없는 쉼은 그것을 위해서 어쩌면 더욱 열심히 뛰며, 발버둥 치는 현대사회의 모습이 비춰지기도 한다. 그것을 위해 쉼을 갖지 않고 일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노동없는 쉼을 보통은 얻지 못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창조질서에 어긋난 것이다. 

또한 쉼 없는 노동은 보자면, 쉼있는 노동은 생각을 해도 마음이 놓이고 편하다. 이유는 쉼없는 노동이 어느새 요즘시대에 일상이 되어가고 있기때문이다. 쉼 있는 노동은, 그렇게 바쁘게 노동하지 않을수 있게 되며, 노동이 지겹지 않게 된다. 물론 지겨울수도 있지만, 지금의 생활에서 보단 훨씬 쾌적한 노동, 여유있는 노동의 길로 한걸음 더 나아갈수 있겠다. 

  하나님의 쉼에 동참하는 것.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노동)에 동참할 뿐 아니라, 쉼에도 동참해야 할것이다. 쉼은 게으름, 나태, 태만이 아니다. 오히려 쉼없는 노동은 창조질서에 반하며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로부터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3절). 제 7일의 안식을 통해서 창조사역이 완성되듯, 쉼을 통해서 비로소 노동이 완성된다. 노동 대신 한가함이 아니라 쉼과 함께 얻어지는 노동의 의미를 말한다. 창 2:2-3절의 서술과 안식일 계명 준수에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쉼에 동참한다"의 관계가 있다. 



2. 창조사역, 구원사건을 기억하라!

  안식일 계명, 출20:8-11, 신5:12-15의 공통점은 "일하지 말라"는 명령이 동일하게 강조된다. 자연에 대한 인간적 개입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의미는 남/여종이나 나그네뿐 아니라 가축들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인은 몽골에 여름에 선교여행을 갔을때, 청년 15명정도가 함께 말을 탈때가 있었다. 여럿이 말을 타고 가는데, 내 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옆구리를 발로 몇번치며 빨리 좀 가라는 싸인을 말에게 줬다. 그때 말은 더 빨리 가는게 아니라 자리에 앉아 버렸다. 그 말을은 많이 지쳐보였었는데, 몸에 병이 있어서 그런지 쉬지 못해서 그런지 앉아버리는 모습에 놀랐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 안식일 계명의 공통점은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아야 사회적 약자가 일을 안할수 있다. 쉼의 축복은 모두에게 허락된 것인데, 중간에 사람이 가로 막는다면 하나님의 일을 가로채는 참 곤란한 상황이 오는 것이다. 종, 나그네, 가축까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차이점으로는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신명기에서는 출애굽의 "구원사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창조신학과 구원신학이 하나로 묶여져 있다. 이러한 차이에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동사는 '기억하라'는 것이다. 출애굽기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그 이유로 적시하고 있고, 신명기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면서, "종되었던 너를 강한 손과 편팔로 인도하신 야훼"를 "기억하라"고 추가적인 설명을 한다.

  하나님의 가장 크게 행하신일 중 하나는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신, 태초에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인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속성 곧, 창조주, 전능하신 분, 사랑으로 인간을 지으신 사랑 등의 그 속성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이고 찬송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자유를 주시고, 절기를 지키게 하시고, 땅과 나라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행위를 고백하는 것이 찬양이다.

  안식일은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구별된 시간이다. 이 날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기억'으로 지켜져야 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이 날에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모범을 따라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구원행동에 대한 기억은 앞으로 그렇게 이러우 주실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미 주어진 안식과 앞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안식 사이에 서 있다.(히3:7~4:13)


3. 안식일

창2:2-3절에서 '안식하다'는 표현을 위해서 사용된 히브리 동사는 <샤바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안식에 근거하여 안식일 계명을 말하고 있는 출20:11에는 <누아흐>동사가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23장 12절에서는 <사바트>와 <누아흐>동사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서로 대응되는 개념으로 '쉬다, 안식하다'의 뜻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때 하나님은 그 일곱째 날을 위해 두가지 행동을 하시는데, 그날을 '복되게'하시고 '거룩하게'하셨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복주심과 거룩하게 하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은 "하나님만이 모든 일의 성취와 존재의 완성을 가져다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로써 하나님은 창조세계에 또 하나의 질서를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 대한 반대의 현상들이 나타나며, 망각하게 되는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모든것을 창조할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모든일을 성취할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인데, 자신의 것으로 취하게 된다.


  예로, 한 큰회사의 사장은 자신이 경영해온 회사를 보며, 본인이 창조, 구원자로 생각하며 살아갈수 있다. 내가 큰 발명을 하며, 내가 사람을 먹이고 살아간다고 생각할수 있다. 그 사장은 자신이 계속 창조해가고, 일을 운영하기 위해 쉼없이 일을 하고, 직원들도 함께 일을 한다. 직원들은 그로 인해, 쉬지못하고 어려운 몸과 마음으로 지내게 되며, 가족과의 시간도 보낼수가 없다. 그러나 그 사장은 본인을 창조자, 구원자라고 착각을 한다. 하나님의 영역까지 본인의 영역으로 착각할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상황에 부딫히며 힘들어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좋은곳을 창조해서 보내달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기에서의  바로"가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대한것과 비슷하다.

바로는 본인이 신이 되었고, 본인의 권력으로 나라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은 쉼을 주지 않는 바로와 이집트에 참된 안식 없이 살게 되었었다. 그들은 외쳤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을 구원할 분이며, 그들이 있을 좋은 곳이 창조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다.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셨고, 이스라엘 사람이 지낼 광야를 창조해주셨으며 후에는 가나안땅까지 주셨다. 이스라엘 사람은 창조주와 구원자를 구했고, 창조주와 구원자 되시는 분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응답해 주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한 중요한목적인 이스라엘의 절기를 지키는 것, 그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인 노동에서 이제는 쉼을 갖는 것이며, 하나님의 하신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필요한 것은 창조주와 구원자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하나님 본인을 창조주와 구원자로 기억하길 원하시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받았으며 그렇게 살도도록 지어졌다.

  우리는 무엇보다 실제적으로 "노동과 쉼", 무엇보다 "안식"에 대해 교회와 사회에 적용되도록 노력해야 할것이다. 노동에 대한 이해, 그리고 쉼의 이해가 필요하도록, 또한 안식의 이해가 있도록 세미나, 성경공부, 토론 등의 시간을 통해 생각해볼수 있는 시간, 이해할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우선 교회활동에서도 쉼을 보장하도록 해줘야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분명한 목회철학과 본인의 그러한 삶이 필요할 것이며, 무엇보다 주일에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구원행동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며, 장차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이루어질 참 안식을 소망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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