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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 글/신학

차별금지

사또2 2019. 6. 7. 04:25

내가 기독교를 선택하고 살아간지 19년 정도되는 시점에서 가장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어릴 때 내가 기독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가 19세 때 교회를 선택하고 의지를 가지고 기도하며 생활한 이유는 내 안에 가득담긴 때(죄)와 그동안 내가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새 삶을 살고 싶어서였다. 19세 때부터 20대 중후반 까지 그 삶을 달려오며 그동안 듣지 못했던, “착하다”, “성실하다”, “잘한다”의 칭찬을 계속들으며, 그것이 신의 칭찬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마치 나는 유대인 기독교(토종 기독교, 예를 들면 모태신앙)가 아닌데 유대인 기독교들과 어울릴 때 생기는 거리감이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안정적인 가정이 아니었고, 교회학교를 다니지도 않았고, 교회에 길들여진 사람들처럼 겁이 많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마치 날것같았고, 그들은 길들여진, 그것은 마치 신에게 길들여진 것으로 말하지만, 교회용으로 길들여지는 것이었다.

20중반 때부터 열심히 일을 하며, 내 수입의 1/10은 십일조, 1/10은 교회청년들에게 식사와 선물을 사주고, 1/20은 구제 등으로 사용했다. 주를 위해 쓴다고 생각하며 사용했다. 돈이 있으면 돕는 거라고 생각하고 후원도 많이 했다. 이 생활의 부작용은 내가 어려울 때 쉽게 도와주던 생활때문에, 돈 있는 사람이 나를 도와줄 때 당연하게 생각하고 크게 고마워하지 않게 됐었다.

시간이 흐르고 여러경험이 지난 후에 알게된 건, 내 과거의 삶(교회를 다니기 전의 삶)을 반성하고 새 삶을 살 필요가 없었다라는 것이다. 학교는 운동을 잘하고, 모험심이 크고,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점을 존중해 주지 못하며, 기준이라고는 성적 높은 것만 중요하며, 다양한 학생들의 역량을 키워주지 못한 학교 잘못이다. 기독교가 아닌 가정과 다른 배경을 불쌍하게만 보며 본인들만 정상이고 축복받은 자였다고 말하는 교회 잘못이었다.

내가 왜 삶을 살아가며 과거의 삶을 정리하고 새 삶을 살아가려고 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 왜 교회에 들어가서 인간개조를 하기위해 그 방식대로 따랐었을까.

어제는 하루 종일 한국교회의 목사가 되기 전 단계에 거쳐야 한다는 목사고시를 봤다. 이곳사람들은 사람들을 교회용으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교회냄새로 가득해서 힘들었다.

중학교 때 선생님께 차별 받았다. 중3 초에 학교를 며칠 안나갔다고 그 뒤로 내가 무엇이든 걸리면 두배씩 맞았다. 내친구도 차별받았다. 학교 주변에 집이 털렸었는데, 내 친구가 그 집을 털었다며 하루종일 무릎 꿇히게하고 맞았다. 교사는 부모가 바빠서 학교에 못오거니 신경 못쓰는 집 아이들에게 더 함부로 대했다.

교회에서 차별 받았다. 참 여러가지를. 물론 많이 도움받은 일도 많아서 뭐라 말하긴 어렵다.

이런 차별을 알게된 건 내가 어릴 때 교회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나를 날 것으로 보고 사용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봤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더 축복을 받고 더 은혜의 삶을 산것으로 느끼며 살았다.

오늘 논술 시험 문제는 “요즘 이슈가 되는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신학적, 성격적으로 비판하고, 목회점 관점에서 자신의 입장, 대안을 말하라”였다.

참으로 무섭다. 계속해서 행하던 차별에대해 여러사람들이 이제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존중하고 평등하게 살자”고 말했더니, 이들은 그목소리에 대답하기를 “지금도 계속해서 차별하고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차별이 금지되면 안된다. 그럼 혼란이 온다.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가 위배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요. 그 다음은 후에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르다. 모두가 똑같이 될수 없다. 차별금지는 하나님 뜻이 아니다.”

본인들에게는 그 승인이, 다른사람들에게는 낙인이, 그게 없다면 믿을수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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