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일기
복음주의 강의 본문
복음주의 노선에서 변증가, 마치 예전의 존스토트 정도보다 더 보수적인 입장의 신학이다.
영혼구원와 사회구원를 말할때, 사회구원은 복음이 아니라고하며 영혼구원을 강조한 입장.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강조를 하며, 사회구원인 삶과 사회구조는 뒤로 하는 신학이다.
사회구원과 삶없는 복음때문에 선교와 신학에 반성을하고 균형된 믿음과 삶, 영혼구원과 사회구원, 인간뿐 아니라 만물의 구원 곧 포괄적인 하나님나라를 말했다. 그러나 그에 반대하고 영혼구원만 강조한 노선이다. 어찌보면 예전에 겪었단 연합없는 선교, 식민지방식의 선교, 사회적 책임없는 신앙생활을 되돌려서 문제를 일으킬수 있는 신앙이다.
사회적 책임없이 영혼구원을 강조하여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의 유익을 취하여 약자를 약탈하고 배제하며, 자기집단이 잘되면 하나님축복이라하지만 그로인한 죽어가는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배타성, 이기적 신앙이다.
1959년 정도에 한국 신학에서 문제되었던 것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을까.
신앙인들이 개인영혼에만 관심을 두고 사회적책임 없이 사는 문제, 교회가 본인 교회의 인원수만 생각하며 타교회를 생각하지 않는 문제, 교인이 교인의 축복, 거룩만 생각하며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문제.
이 문제를 피해갈수 있는건 영혼구원을 강조하고 그것만 생각하고 그곳으로 피하는 것이다.
영혼구원, 입으로 시인으로 구원. 참 달콤한 말이다. 그 말은 내가 잘살고 있다고 신의 대리인이 확증 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 정의와 양심, 평등과 사랑으로 살기는 어렵다. 그 어려운 말에는 내가 회사에서 가족과 친구들과 살아가며 책임지고 균형있게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 사영리를 전하며 사는 것, 아침 저녁으로 큐티하는 것, 내가 술 담배를 안하고, 연애를 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회사가 법을 사용하여 타회사에 피해를 주는 과정을 불편해하고 고치는 것, 불법으로 학교에 입학하여 다른사람에게 기회를 잃게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 장사를 위해 지나치게 욕심을 내서 옆가게와 주변 가게를 문닫게 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구조를 바꾸는 것.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기에 나는 다르다를 보이는게 아니라, 잘못된 구조와 과정에 반대하여 구조와 과정을 고쳐나가도록 희생하고 저항하고 행동하는 신앙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나는 너희와 다르다. 이렇게 행동한다.”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예수는 안식일 율법으로 아픈자를 못고치게 하는 구조를 반대하며